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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6-17 20:11
화랑외사 : 물 계 자(勿稽子) - 02편
 글쓴이 : 편집부
조회 : 2,869  



                                 [ 사진:김 홍도-주막]


출처: 화랑외사(김 범부저)중 물계자편에서



 언제나 말이 적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별반 대답 없이  

싱긋 웃어 버리고 마는 물계자이언만 그럴싸한 술이 있으면  

누구나 권하는 대로 과히 사양 않고 얼마든지 마셨고, 또 술이 취하면 

누가 과히 청할 것도 없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혹시 좋은 봄철이라든지, 달 밝은 밤이라든지 한 때면 같이  

취한 근처 사람들과 어울러져 으레히 앞장서 활개를 벌리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이럴 때의 그는 자기가 지은 노래, 자기 작곡에 춤까지 끼워  

선창을 대는 것인데, 유별나게도 키 큰 물계자가 황새 춤으로 앞창을 

대면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뒤(후렴)를 받는 것이었다.  

 

그 노래는 <봄 술>이라 하였다. 

 

  삼거리 주막에 나그네 오고 

  삼거리 주막에 나그네 가네. 

  나그네 가는 날 나그네 오고 

  나그네 오는 날 나그네 가네. 

 

  달 좋은 봄철이 몇 밤이뇨. 

  알뜰한 이 밤이 가단 말이 

  얼시구 놀잔다 벗님네여 

  얼시구 들시구 놀다 가세. 

 

  접동새 비렁에 꽃이 피고 

  접동새 비렁에 꽃이 지네. 

  꽃 지는 가지에 꽃이 피고 

  꽃 피는 가지에 꽃이 지네.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그 누구 할 것 없이 물계자가 나오면 

반겨 인사를 했고, 술이 있으면 반드시 물계자를 청했다.  

청하면 술만은 으레 사양 않고 응했으며 언제나 조금도 얼굴에  

불평 없이 누구에게든지 좋은 말만 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걱정 없는 물계자>, 혹은 심히 말하는 사람이라면  

<속없는 물계자>라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걱정 없는 물계자로 불리워지는 그 속일수록 외롭고, 

심심하고, 궁금한 것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바람이 분다든지 비가 온다든지 할 적이면 흔히 한 밤중에 

혼자 일어나 앉아서 거문고를 만지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네 활개를 벌리고 <봄 술 타령>을 앞창 대던  

물계자와는 또 딴판이었다. 

이러한 때의 그는 그윽한 소리로 누가 엿듣는 것을  

두려워나 하듯 목을 나직히 해서 

 

“마누라...” 

 

하고 불렀고, 또한 이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익은 

버릇임을 잘 아는 부인은 언제나 부드러운 목소리와  

조용한 얼굴빛으로  

 

“예” 

 

하고 순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그저께 그 집에서 얻어 온 막걸리 남지 않았소? 

부인이 으레 준비해 둔 술 항아리를 가까이 옮겨다 주면 물계자는  

몇 모금 목을 추기고 나서 자기가 작곡한 가락으로 우렁차게 거문고 

줄을 울렸으며, 이따금은 이 또한 자작의 사슬로써 혼자 병창을  

하기도 하였다. 

 

  바다가 울어 성낸 물결이  

  야횐 밤중에 왼 땅이 뒤누어  

  미르가 짓나니 구비를 치나니 

  구비를 치나니 미르가 짓나니 

  벼락아 아느뇨 사나이 가슴을 

 

  바람이 일어 세찬 바람이            

  천리를 불어 만리를 가자 

  자던 갈범이 으흐렁 으흐렁             

  쌍불이 철철철 바람을 달려라 

  벼락아 아느뇨 사나이 가슴을  

 

그런데 이 곡조는 <벼락아 아느뇨>가 제목이었고,  

<벼락>이란 다름 아닌 자기 칼 이름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거문고 타기를 마치면 그는 한 밤중에 번개 같은  

칼을 빼 들고는 가만히 두 눈을 칼날에 모아 아무리 술을 마셔도 

술기도 없는 채 오랫동안 흙이나 돌로 만든 사람처럼 앉아 있는 

버릇이 있었다. 처음에는 부인이  

 

“저렇게 앉아 있으면 칼이 무슨 이야기나 하나요?” 

 

하고 조롱하듯 물어 본 적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원채 여러 해 

두고두고 익은 일이라 부인마저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서  

잠들던 것이었다. 

 

남모르는 한숨과 함께 쉬지 않는 수련으로 청년시대를 지내 보내고 

그럭저럭 중년이 된 물계자는 어지러운 번민도 우둘우둘한 객기도  

다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고 익을 대로 익어서 그 생각이나 말씨나 

모든 행동이 조금도 어색한 데가 없었다.  

그래서 번민을 품은 사람이나 무슨 걱정이나 있는 사람들이 물계자를 

대하면 별반 신기한 말을 듣기도 전에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고 가슴이 

부드러워졌다.  

 

그런지라 물계자가 중년이 되었을 때는 검술, 음악, 그리고 검(神靈)을 

섬기는 묘리(妙理)는 말할 것도 없고, 혹은 처세법, 혹은 정치,  

혹은 군사를 물으러 오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며, 또 그의 초당에는 

언제나, 몇 달 혹은 몇 해를 두고 전심으로 자기 지망(志望)대로  

수련을 쌓고 있는 몇 사람의 청년들이 묵고 있었다. 

 

물계자는 누가 무엇을 묻든지 묻는 그 말 따라 예사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나 특별한 지망을 가지고 오랜 세월을 두고 수련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과목(科目) 수련의 준비 과정으로 정신(精神)의 수련부터 

먼저 시켰다.  

 

이를테면 검술을 배우러 온 사람에겐 먼저 음악을 가르치고,  

음악을 배우러 온 사람에겐 먼저 검술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뭣이든지 도리(道理)란 두 가지 없다는 묘리(妙理)를 깨쳐 

얻은 물계자로서는 으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계자는 제자들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하였다. 

 

“검술이나 음악이나 그 밖에 무엇이나 열 가지고 백 가지고 간에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꼭 바른 도리(道理)이기만 하면  

반드시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거문고를 탈 때 만약 손으로 타는 것이라면 아무 손이라도 

같은 거문고 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거문고 소리는 누구든지 다 같지 않다.  

같은 손으로 타는 거문고이건만 사람 사람에 따라 다 다른 것은 

마침내 손이 타는 것이 아니라 손말고도  

다른 그 무엇이 타는 까닭이다.  

 

또 칼을 손이나 눈으로 쓴다는 것도 될 말이 아니다.  

손으로 쓸 것 같으면 아무 손이나 칼을 쓸 수 있고  

눈으로 쓰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그럴 수 있을 텐데,  

다 같은 손과 다 같은 눈으로써 칼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은  

역시 칼을 손이나 눈으로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손이나 눈 말고도 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칼을 쓰거나 거문고를 타거나 둘이 아닌 그 무엇,  

쉽게 말하자면 그 것을 사람의 <얼>이라고 해두자.  

천 가지 만 가지 도리가 다 이 <얼>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이 <얼>을 떼어 놓고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것은 소 그림자를 붙들어다가 밭을 갈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허망한 소견이야.“ 

 

그래서 늘 수련을 시킬 때 먼저 그 사람을 조용히 자리에 앉게 하고, 

으레 처음 묻는 말이 

 

“너 숨을 쉴 줄 아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안다든지 모른다든지 간에 이어서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숨이란 만들어 쉬는 것이 아니라 절로 쉬는 것이야.  

그러나 숨을 바쁘게 쉬는 사람도 있고 늘어지게 쉬는 사람도 있어, 

숨도 저마다 꼭 고르게 쉬는 건 아니거든.  

 

그러므로 숨을 고루는 것이 <얼>의 앉을 자리를 닦는 것이니  

<얼>의 자리가 임의롭고 난 뒤에야 무슨 수행(修行)이든지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나 먼저 말과 같이 숨을 고룬다는 것과 숨을 만드는 것은  

아주 딴 판이란 말이야.  

 

모든 수행을 그냥 두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좀 섭섭한 일이긴 하나, 큰 병신까지는 아니지만 숨을 만들어 쉬는 것 같이 더 큰 병신은 없는 거야.  

 

그러나 세상에는 숨을 만들어 쉬는 사람들이 적지도 않은 것이니, 

너희들은 별수 없는 사람이 될지언정 병신은 되지 말아야 해.“ 

 

“숨을 고룬다, <얼>의 자리를 닦는다,  

천만 가지 일과 천만 가지 이치가 여기서 시작되는 법이거든.  

여기서 시작된 것이 아니면 참된 지경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설령 모르는 사람의 눈을 언뜻 속여 넘기는 수 있으랴 하고라도 

검(神靈)님이 그런 사람의 눈에 망(網)을 덮어 버리는 거야.“ 

 

그리하여 칼을 배우려 온 사람에게 거문고를 가르치거나,  

거문고를 배우러 온 사람에게 칼을 가르치거나 할 때  

어떤 사람은 흔히  

 

“선생님, 저의 지망은 다르옵는데요.” 

 

하는 수가 있었는데 물계자는 한결 같이 똑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글쎄 알아, 모르고 하는 일이 아니야.  

천만 가지 일과 천만 가지 이치가 둘이 아닌 줄 꼭 알란 말이야. 

<얼>의 앉을 자리만 닦아지면 아무것이나 다 이룰 수 있는 법이야.“ 

 

이러한 방법의 수련으로 얼마를 지내고 나서는 누구나 

대선인(大仙人)의 신통한 교육법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 계 자(勿稽子) - 0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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