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冬 南行
大王 岩 1
[사진:문무대왕능]
경주가 남쪽이긴 하지만 계절이 계절인지라 안간 힘으로 버티고 있던, 수목의 형색도 어쩔 수 없이 변해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이 늦은데다가 겨울의 한 나절이란 것이 28일로 끝나는 2월의 월말처럼 마음을 재촉하는 것이고 보니, 시내에서 감포로 넘어가는 산속의 꼬부랑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길이 잘 닦여있는 보문단지 쪽으로 가지 않고, 지도상으로 가까워 보이는 산길을 택한 것이 오히려 시간을 더 낭비한 결과가 된 듯도 했다.
겨우 산길을 빠져나와 보문단지 쪽에서 오는 관광도로와 만난 후로는 길은 순조로웠다.
바다는 가까웠고, 금세 해안가에서 대왕암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달려온 노력을 알아준 것일까, 남은 햇살이 그만 그만하여 대왕암을 살펴보는 데는 손색이 없었다. 욕심 같아서는 경주 문화제 관리를 맡은 기관에 신청을 하여 직접 대왕암에 올라가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이번 여행에 허락 된 시간이 너무나 빠듯하여 이렇게나마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마침 날씨가 맑았고 기온도 적당하여 넓고 푸른 동해바다의 수려함은 그 아름다움을 더했다. 온갖 망념으로 뒤척이던 밤이 가고 맑은 아침을 맞은 것처럼, 도시의 나그네는 언뜻 해탈이라도 하는듯한 느낌이었다.
[사진:문무대왕능]
수학 여행을 온 학생들의 무리가 해변에 몰려다니고 있었다.
[사진:문무대왕능 안내판]
[사진:문무대왕능 ]
물속에다 능침을 마련한 예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문무왕의 해중능, 대왕암.
그 대왕암은 해변에서 아주 가까운 암초로 이루어져 있었다.
실제 능침으로 인정받는 대왕암의 범위는 밭 전자(田)모양으로 생긴 부분이고, 그 주위에도 한 두 개의 암초가 더 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떤 글의 내용에서는, 주위에 작은 암초가 12개 있어서 12지신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누구라도 직접 가서 보면 알겠지만 확대 해석을 한 느낌이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三國遺事 文武王 法敏)의 기사에는, “遺詔葬於東海中大巖上”이라고 되어있고,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대한 기사 속에도, “蓋遺詔之葬骨處 名大王岩”라고 하여 대왕의 유조로서 이곳 동해바다에 있는 큰 바위 위에다 “뼈로서 장사지낸 것(葬骨)”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또 “그 장골처의 이름이 대왕암이다” 라는 것이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장이적신(葬以積薪)” 이란 문구와, 분골경진(粉骨鯨津)이라는 말이 나온다.
땔감을 쌓아서 장례를 했다는 것을 보면 화장이 틀림이 없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글이 삼국유사 문무왕조(文武王條)에 나와 있다. 왕은, 능을 만든다고 해도 인력과 재정만 허비하고 세월이 지나면 모두 허무한 모양이 되고 말 것이라는 뜻을 밝힌다.
또한, 사후 십일에 인도식으로 화장을 할 것이며, 장례절차는 검소하게 하고 세금도 필요한 것 외에는 모두 헤아려 폐하라는 명을 내리고 있다.
엄연히 왕의 유지를 받들었다는 글들이 중복되는 것을 본다면 문무왕 사후에 마음들이 바뀌어 매장을 한 사실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왕암은 명백히 왕을 화장하고 그 뼈를 뿌린 산골처(散骨處)라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삼국사기: 문무대왕 21년, 가을 7월 1일群臣以遺詔言葬東海口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岩,군신이 유조에 말씀하신대로 동해의 입구 대석상에 장하였다. 속가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화했다고 한다. 그것을 따라 그 돌을 가르켜 대왕암이라 했다.
[사진:이견대]
[사진:이견대 안내판]
삼국유사: 문무왕조 蓋遺詔之葬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유조의 장골처 이름이 대왕암이며 절의 이름은 감은사다. 나중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것을 본 곳의 이름은 이견대이다.
또한 대왕암의 모습과 그것이 있는 장소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글도 있다.
여지승람 경주 이견대 조(輿地勝覽 慶州 利見臺條)에는,
“臺下十步 海中有石 四角聳出如四門 是其葬處 至今稱大王岩” 이라고 명백히 밝혀 놓았다.
즉, “이견대 아래 십 보되는 거리의 바다 속에 돌이 있는데, 네 모퉁이가 솟아올라 있어서 마치 네 문과 같다. 이것이 바로 그 장처이며 지금 대왕암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다.
유 흥준 교수는 그의 저서인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에서 이 대목을 조선왕조실록 지리지를 인용하여, "이견대 아래쪽 70보 가량 되는 바닷 속에 돌이 있어 4각이 높이 솟아 4문과 같은데 여기가 문무대왕의 장처이다“ 라고 적고 있다.
같은 내용의 글인데, 단지 이견대 아래 십 보와 칠 십보의 차이가 있다.
이것을 지금 이견대에서 보자면 모두가 실제 거리와는 다르다.
아무리 거한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이견대에서 십 보나, 칠 십보를 걸어서 대왕암에 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견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말대로 라면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대왕암 바로 위, 그러니까 지금 해변에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 있었다고 해야 이 말들과 맞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에서는 도저히 이 기록에 부합되지가 않는듯 보인다.
이 이견대의 자리에 대하여도 여러 설이 있다.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감은사 뒤편 산에 있었다는 말과, 지금의 자리에서 흔적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옛날의 건축을 상고하여 지금의 이견정을 지었다는 설이다.
“감은사 뒤편 산 위”라는 소리는 인터넷의 한 “종교 연구소”에서, 근처 어느 절의 주지가 한 말을 인용한다고 소개한 말이다.
이것은 지금의 이견대와 비교하거나, 실제 대왕암과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옛 기록과 너무나도 거리가 있다.결국 글을 제대로 해석하자면, 이견대 아래 바다까지는 십보나, 칠십보라는 말이고, 이 바다 속에 있는 지금의 대왕암이 장골처다 라는 것이 옳다.
이렇게 놓고 보면 지금의 이견대는 옛 기록과 비교해도 그다지 틀린곳이 아닌성 싶다.
또 이 글에서는 분골경진(粉骨鯨津)이라는 말을 “고래가 사는 깊은 바다에 뿌린 것”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유흥준 교수가 홍양호가 발견한 문무대왕비에서, 연골경진(硏骨鯨津)했다는 것을 “뼈를 부수어 바다에 뿌리다”로 해석한 말과 비슷하다.
그러나, 연골(硏骨)은 부순 것(破)이 아니라, 갈은(硏) 것이다.
그리고, 경진(鯨津)은 “고래가 사는 깊은 바다”거나 "바다에 장사를 지낸다"는 말이 아니다. 경진(鯨津)은 “고래 나루터”라는 뜻으로서 이 말들과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다.또 “대하 십보거나 대하 칠십보”거리에 있다는 대왕암이 “고래가 사는 깊은 바다”일리는 만무하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왕암은 해변에서 불과 지척으로서, 그 곳이 깊은 바다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대왕암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산골처를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해변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왕암을 제외하고는 망망대해에 그럴싸한 암초조차 없는 것이 감포 앞 바다이다.
특히 “사각용출여사문(四角聳出如四門)”이라 하였고, “시기장처(是其葬處)”라는 말을 볼 때,
그 네 귀퉁이가 솟아있고 마치 네 문같이 보이는, 그곳이 장처라고 한 말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대왕암 말고 어디서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있겠는가?
당연한 것을 놓고 쓸데없이 꼬투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우리가 지금 까지 살펴본 인용문들 속에서 실체를 묘사한 글들이 어떤 형편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왕암처럼 분명한 것을 놓고도 이렇게 묘사가 다르면 우리는 그런 부실한 기록들에 의해 무엇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을 것인가?자신의 주장을 위해 임의로 해석을 하거나 충실하지 못한 자료나 인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이 많기에 하는 말이다. 광개토 대왕의 비문에서 한 글자를 잘못 오독하면 진실한 역사와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그 폐해를 우리는 잘 알고있다.
이 글들이 심각한 부분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옛 글들을 해석하는데 신중해야 한다.
사소한 해석의 차이가, 직접 대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인식에 얼마나 잘못된 견해를 갖게 하는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선대의 인물들이 비석하나의 문자선택에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더구나 통일제국의 왕의 묘비에 선택된 자구 한자한자는 여간 신중한 선택이 아닐것이다.
그 지엄한 인물의 뼈를 다루는데도 결코 오늘날의 화장 같은 자세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감히 대왕의 화장한 유체를 절구로 찧어서 가루로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대왕의 유체가 절구 공이로 부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아들, 신문왕이었을 것인가 말이다.
나중에 그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여 감은사를 짓고 몇차례나 이견대에 가서 용으로 화하는 아버지를 보려고 노력한 왕의 목전에서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결국
비문에 나온대로 왕의 남긴바 유골은 적당한 맷돌을 활용하여 갈아서 가루로 낸것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많은 문자 중에서 연(硏)이란 글자를 선택하게 된 것 일 것이다.
실제 화장된 유골은 이미 불로 처리 되었기 때문에 큰 타격을 가해야 분쇄가 되는 상황이 아니다.
큰 열을 받은 사람의 뼈는 작은 힘에도 가루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각이 용출되어 사대문 처럼 보인단 말은 무엇인가?
앞서도 말한바처럼 장지로 인정된 범위는 위에서 볼 때,밭 전자 모양으로 보이는 네개의 바위를 말하고 있다.
이 네개의 솟은 바위들은 가운데 물이 들낙거리는 틈을 중심으로 대문의 두 문짝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동서남북네 방향에서 각각 두 문짝처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마치 네개의 문처럼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네 방향의 가운데 있는 틈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는 홈을 비유하여, 마치 이리의 미륵사지 탑 하부 통로 같은 불교의 탑건축 형식이라고 설명한 글이 있었다.
이것은 대왕암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천부당 만부당한 해석이다.
나는 1980년 여름에 미륵사지 탑의 하부를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 그 때 실측한 바에 의하면 탑의 방향은 모서리가 정방을 가르키고 있었다.
즉,동서남북의 정방을 가르키는 것은 탑의 모서리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탑의 하부에 있는 통로는 간방쪽으로 열려있는 구조인 것이다.
이곳 대왕암의 홈이 있는 방향은 이와 달리 정방이라는 설명들이 있다. 또 불교식의 화장을 부탁하긴 했으나 정작 이 대왕암의 구조는 불교와는 다른 세계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대왕암 2 에서 다른 중요한,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과 함께 다루어 질 것이다.
이제 대왕암을 놓고 왜 경진(鯨津)이라는 말이 나왔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차례이다.
실제 이견대에서 보았거나 감포에서 그 앞바다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견대를 지나 감포항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방파제가 하나 있다. 그리고 그 방파제 주위에는 대왕암처럼 바다 암초들이 몇 개 나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이 암초들을 제외하고는 감은사 동쪽, 대왕암의 주위에 암초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깊은 바다”가 아니면서, 산골처로서의 대왕암을 묘사한 경진(鯨津)이란 말은 왜 생겨났는가?동해는 원래가 고래가 출몰하는 곳이며 옛날부터 고래를 사냥을 했던 곳이다. 그러나 정작 고래를 많이 잡았던 곳은 감포가 아니다.그런데도 감포를 고래 나루터라고 한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궁금했지만 그 답은 이견대로 갔을 때 저절로 드러났다. 이견대에서 잘 바라다 보이는 대왕암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한 마리의 고래잔등이었다.
[사진:이견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능]
[사진:이견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능]
마치 한 마리의 고래가 포구를 향해 들어가는 듯한 모습.